호랑이 시리즈(3) 한민족 5천년 역사는 호랑이와의 전쟁 ..

칼럼 > 2022-04-10 23:17:13

한반도는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호랑이의 나라’였다. 단군 신화를 필두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벽화에도 호랑이와 표범이 여럿 등장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비디오를 켜면, 어김없이 ‘호환·마마보다 무서운...’이라는 문구가 떴다. 옛날에는 호랑이에게 입는 호환(虎患)과 천연두(마마·媽媽)가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환이 심했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등 시골 마을에서는 범의 침입에 대비해 아예 마을 전체를 큰 나무를 쪼개어 목책과 울타리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개구멍’이란 말이 유래도 그렇다. 원래 호랑이 습격에 진돗개가 피할 수 있도록 부엌 문턱에 만든 전남 진도 특유의 색다른 가옥 구조였다. 


‘호랑(虎狼)’이란 원래 ‘범과 이리’라는 뜻.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을 빗대어 이르는 말. 그런데 언제부턴가 범 대신 호랑이, 이리 대신 늑대란 말이 보편화됐다. 낮엔 왕이 지존이었지만, 한반도의 밤은 호랑이와 표범이 지배했다. 기록이 풍부한 조선 시대 호랑이에 의한 피해는 현재의 교통사고 발생률보다 높았다.


‘호랑이’라는 단어는 18세기 문헌에서야 보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범’은 고려 시대 문헌에도 나올 정도로 역사가 깊다. 


■ 고려말, 호랑이 때문에 한양 천도를 망설여 


호랑이의 주서식지인 동북아는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다.  삼국시대 때부터 호랑이에 의한 피해는 조선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적지 않았다. 수시로 궁궐이 털렸고, 궁궐을 지키는 병사를 물어갔다. 843년 신라 문성왕 때는 한꺼번에 호랑이 5마리가 신궁에 나타났다.


고려 시대도 호랑이나 표범의 ‘깽판’은 마찬가지. 다만 <고려사>에서 범의 출몰을 기록한 사례는 대부분 개경의 도성이나 궁궐에 출현한 것에 그쳤다. 1390년 9월 공양왕은 한양으로 잠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호랑이 피해 등이 너무 커 1391년 2월,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공양왕이 북악산, 남산은 물론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도 소용없었다. 


기록을 꼽아 봐도, 개경보다 한양에서 호랑이가 더 득시글거렸다.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 4대문 밖은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의 나주시나 상주시 인구 10만 명과 비슷한 작은 도시였다. 수많은 산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등 하천들은 초식 동물들의 안식처였고 표범과 호랑이 같은 포식자들을 불러 모았다. 


조선시대 왕들은 내내 ‘호랑이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오죽하면 호랑이를 잡으면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호랑이 사냥 전담 특수부대는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 1277년(충렬왕3) 12월, 고려는 원나라에서 호랑이 잡는 전문 사냥꾼 ‘착호사’ 18명을 요청했다. 이들은 사냥개 150마리까지 데리고 왔다. 


조선 초 군마를 사육하던 의정부 녹양 목장은 계속된 호랑이의 공격에 세조 때 폐쇄할 지경에 이르렀다. 제주도 목장은 원래 몽골이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조성했던 게 시초다. 그 후로 운송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 목장으로 쓴 이유는 제주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무용총 벽화 속 호랑이 사냥 그림



▲ 2008년 드라마<바람의 화원>에서는 호랑이 그림을 그리던 단원 김홍도(박신양 분)가 호랑이에게 쫓겨 도망치다 절벽에서 떨어진다. 겨우 목숨을 건진 후 정조에게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뻔한 호랑이 그림을 선물한다.  바로 이 그림이 전문가들이 호랑이 그림 중 세계 최고라고 하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호암미술관 소장



글 박승규 논설위원 


박은주 기자 / silver51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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